라 페드레라의 사랑의 수수께끼
1906년, 카사 밀라와 누센티즘은 가우디와 에우제니 도르스와 연관된 테레사 메스트레라는 인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만난다.
1906년,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파세이그 데 그라시아 거리 부지에 상징적인 모더니즘 건물인 카사밀라 혹은 "라페드레라" 프로젝트의 첫 벽돌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작가 에우헤니 드'오르스 사는 누센티즘의 아이콘이자 카탈루냐 문화 부흥의 정수로 자리매김한, 아름답고 존경받는 신비로운 뮤즈인 테레사, 라벤 플랜타다(“잘 자란 여성”)에 관한 첫 에세이를 La Veu de Catalunya(카탈루냐의 목소리)에 발표했습니다. 이 두 사건은 상반된 두 가지 예술적이면서도 지적인 운동의 부상을 알리는 것이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은 제 증조할머니 테레사 메스트레 데 발라디아로 “엘 파드리”로 알려진 저희 증조할아버지의 아내이기도 했습니다.
2년 후, 가장 모더니즘적인 예술가였던 라몬 카사스는 제 증조할머니의 초상화를 몰래 그렸습니다. 에우헤니 드'오르스 사는 벤 플란타다에 영감을 준 이 그림을 보고 이것이 누센티즘의 초석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또한 기존의 카탈루냐 명사 갤러리를 보완하기 위한 아름다운 카탈루냐 여성 갤러리라는 대담한 기획을 선보였습니다. 그는 이 갤러리의 첫 번째 초상화는 저희 증조할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인 호안 마라가는 이 기획을 열정적으로 지지하였으며 이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도록 사회적인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자주 그렇듯이, 이 계획은 산산조각났습니다. 발라디아 가문의 부유하면서도 당당한 가장인 라모나 이모는 그러한 예술적인 경박한 짓거리에 분개하며 테레사를 아르헨토나의 저택에 가두기로 결정합니다. 이곳은 건축가 호셉 푸이그 이 카다팔크의 리모델링을 거친 광대한 성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useu d’Art de Catalunya(카탈루냐 미술관)은 라몬 카사스의 초상화 La Ben Plantada를 요청했습니다. 카사스는 제 증조부인 엘 파드리에게 허락을 구했고, 그는 미술관에서 그 작품을 보관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갈등을 피하기 위하여 카사스는 해당 그림이 초상화 갤러리에 더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규정을 담은 조항을 요구했습니다.
아름다우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테레사는 라모나 이모의 처벌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자신의 세 아이들인 힙과 니니, 니누스를 고모에게 맡긴 채 말을 타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테레사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가문 소유의 저택으로 옮겨갔으며, 남편과 아이들이 자신을 뒤따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테레사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렇지만 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라모나 이모는 엘 파드리에게 아내에게 돌아간다면 상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으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테레사는 수 차례나 편지를 썼지만 비밀을 가장 우선시했던 라모나가 가문의 평판을 지키고자 편지를 전부 가로채고 말았습니다.
테레사는 바르셀로나에 소재한 가문 소유의 여러 집을 전전했습니다. 그중 한 곳이 라페드레라이며,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가장 어려운 시기에 그녀가 살던 곳이 바로 라페드레라라고 합니다. 라페드레라 아파트는 300평방미터에 달하는 크기였으나 pied-à-terre(피에아테르, 임시 별장)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은 가족들이 리세우, 팔라우 데 라 무시카 극장에서 늦게까지 머무르거나, 파티가 있거나, 리에라 데 마타로의 으리으리한 저택이나 아르헨토나의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 없을 때 지내는 중심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공간이었습니다.
라모나 이모는 테레사가 더 이상 아이들을 만나보지 못하게 했으며, 아이들을 아르헨토나의 아버지와 함께 지내도록 했습니다. 테레사는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때 다재다능한 문화 활동가이자 Institut d’Estudis Catalans(카탈루냐 연구소)의 설립자이기도 한 젊고 매력적인 추종자, 호셉 피호안이 그녀를 도우러 왔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촉망받는 인물 중 하나였던 피호안은 테레사와의 열애 스캔으로 인하여 엘 파드리의 친한 친구인 푸이그 이 카타팔크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테레사 발라디아와 호셉 피호안의 로맨스는 “별나고 신비로운 비행”이라고 하는 카탈루냐 벨에포크 사회에서 벌어진 대규모 스캔이자 수수께끼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사실이 불명확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머물렀으며, 언제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은 바르셀로나에 머무르고 있을 때 테레사가 피호안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지 여부입니다. 테레사와 피호안은 둘 다 자세한 내용을 밝히는 것을 거부했고, 사실을 말해도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습니다.
테레사는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테레사는 피호안과의 사이에서 아이 둘을 낳았고, 두 사람은 전 세계를 여행하며 당대의 유명인사들에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테레사는 병실에서 친한 친구 안드레 세고비아의 기타 연주 소리를 들으며 임종했습니다. 이후 피호안은 훨씬 어린 비서와 재혼하여 제네바에 살았습니다. 상심한 엘 파드리는 아르헨토나 저택에 고립되어 수도승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엘 파드리가 테레사의 Centre Excursionista de Catalunya(카탈루냐 탐험 클럽) 회비를 테레사의 임종 소식을 전해들을 때까지 계속 본인이 지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는 부부가 피레네와 알프스 산맥에서 보냈던 행복한 시간에 대한 헌사였을지도 모릅니다. 테레사의 임종 소식을 들은 엘 파드리는 죽기 전까지 항상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살았습니다.
라페드레라 아파트는 항상 비어 있는 채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장남인 힙은 파세이그 데 그라시아와 카레르 발렌시아에 아파트와 타워 스튜디오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술적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하지만 축제에 가까운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니니는 바비드레라 기슭에 있는 빌라에서 지냈습니다. 제 할아버지 니누스는 바르셀로나에서 공부하는 동안 산트 헤르바시에 있는 본인의 약혼녀인 라트 데 페라테르 요락의 거처에 종종 머무르곤 했습니다. 결혼한 이후로 둘은 공장에 가까운 마타로로 이사를 갔습니다. 엘 파드리만 가끔 라페드레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빠르게 아르헨토나로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1930년 초반까지 엘 파드리는 아파트의 집세를 납부하였습니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공간 치고는 꽤 오랜 세월이었지요.
한 가지 생각이 저를 괴롭힙니다. 엘 파드리는 아무런 알림이나 경고 없이, 그의 영원한 사랑, 벤 플렌타다가 이곳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라페드레라 아파트를 지켜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