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페드레라 역사

역사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고 역사적 양식과는 다른 방식을 구축한 안토니 가우디는 전성기에 이르러 라페드레라로도 알려진 카사밀라(1906~1912)를 설계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민간 건축물이었으며, 기능, 구조 및 장식적 측면에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왕자와 외교관, 변호사, 공증인, 의사, 섬유 및 자동차 사업가, 배우와 예술가, 기자와 정치인, 스파이, 예언가와 군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 건물에서 거주했습니다.  

가우디의 작품은 논란과 무시로 점철된 시기를 지나 세월이 흐르며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게 되었으며, 라페드레라는 바르셀로나 건축의 핵심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건물이 가진 자원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충족하게 되면, 건물은 개성을 지니며, 그것은 곧 건물의 품격과 같은 것이다.” - 안토니 가우디

라페드레라의 역사


1906
프로젝트와 건축
로사리오 세히몬과 페레 밀라는 가우디에게 새로운 자택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했습니다. 1906년 2월 2일, 자택의 설계도가 시의회에 제출되며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09년 에이샴플레 위원회는 해당 건물은 그 특성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시 조례를 엄격하게 따를 필요가 없다고 인증했습니다. 1912년 10월 31일, 가우디는 공사가 완료되었음을 인증하였고, 본인의 설계와 감리에 따라 자택 전체가 임대 가능한 상태임을 알렸습니다.
 
이 건축은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La Edificación Moderna (1908) 잡지 등 유수의 매체에서 여러 차례 다루어졌습니다. 해당 잡지에서는 가우디의 작품을 “건물의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그 독창성을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가우디는 현대적 삶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면서도 재료의 성질이나 내구도가 자유로운 설계를 막지 않도록 노력하였다고 전해지며, 넓고 매우 밝은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새로운 기둥 구조를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1906

1912
첫 세입자와 첫 리모델링 
첫 세입자들은 밀라 및 세히몬 부부의 친구 혹은 지인들이었습니다. 유명인사도 있었는데, Abadal y Cía 자동차 브랜드의 소유주 파코 아바달, 아르헨티나 공화국 영사였던 알베르토 이 가체, 메인 플로어 일부를 임대했던 의사 야우메 퀘랄토 이 로스, 섬유 기업인 안토니 펠리우 프라트 등이 있었습니다. 이 기업인은 본 건물에서 최초로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보유한 인물이었으며, 가우디는 이를 위해 지하에 위치한 차고의 입구를 고쳐야만 했습니다. 이집트 왕자, 외교관이자 사업가 이브라힘 하산, 히스패닉계 미국인 하숙집과 발라디아 가문도 있었습니다.  
 
로사리오 세히몬은 본인의 아파트에 있는 가우디의 장식을 싫어했으며, 가우디의 죽음 이후 아파트의 일부를 철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532.50㎡의 천장을 철거하고, 인테리어 담당자 모데스트 카스타네 이 로레트에게 새로운 공사를 의뢰했습니다. 파티룸과 , 딸려 있는 메자닌(중이층)과 현관, 사무실과 라운지, 거실과 응접실, 침실과 복도가 이 공사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기목상판과 셔터가 제거되고, 스무 개의 문과 창문이 교체되었습니다.
1912

1929
상업 공간과 스페인 내전
건물 1층에 최초로 들어선 상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모세야 양복점, 마르벨 속옷점, 솔레 식료품점, 에스테반 로이헤 가구점과 삭세아 호텔 펜션이 성업했습니다. 
 
1936년 7월 17일, 군사 쿠데타로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라페드레라는 압류되었으며 전쟁 당시 공화 정부의 여러 부처의 사무실로 이용되었습니다.  
 
전쟁 도중 밀라-세히몬 부부는 타라고나의 블라네스와 르’알레익사르를 오가며 생활했습니다. 부부는 1939년 전쟁이 끝난 뒤 파세이그 데 그라시아로 돌아왔습니다. 
1929

1940
새로운 소유주
1940년 2월 22일, 페레 밀라가 사망했습니다. 이후 새로운 세입자들이 들어왔습니다. 바로 로카 사스트레 뭉쿠니 가족(‘라페드레라의 공증인’), 이글레시아스-로비라 가족, 몬세트 가족, 바예트-투세트 가족이었습니다. 전후 시대의 고급 상점 중 하나였던 퍼퓨메리아 마그다 브랜드 최초의 상점이 파세이그 데 그라시아의 1층에 둥지를 틀기도 했습니다.  
 
1946년, 로사리오 세히몬은 건물을 Compañía Inmobiliaria Provenza, SA(CIPSA)에 매각하였지만 메인 플로어에 계속 거주했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맺은 계약은 조카이자 화가였던 페레 세히몬과의 계약이었습니다.  
1940

1947
단기 숙박용 아파트와 첫 문화재 지정
1953년, F.J. 바르바 코르시니가 다락에 14개의 아파트를 설계하였습니다. 이 아파트들은 단기 숙박용으로 설계된 것으로, 건축가가 직접 만든 가구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아우렐리 비스베의 주얼리 상점, 더 카인드 장난감 상점, 트리아스 이 푸홀 박사, 이탈리아인 저널리스트 알프레도 조르조 메소리, 비뇨기과 전문의 안토니 푸이그베르트와 시멘트 몰린스 회사가 이곳에 입주하였습니다.
 
1962년 10월 30일, 라페드레라는 바르셀로나시 역사 및 예술 유산 목록에 등재되었습니다. 이 목록은 도시 기념물 보존을 목적으로 스페인에 최초로 작성된 것이었습니다. 
1964년 6월 27일, 로사리오 세히몬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우디와 라페드레라는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1956년, '가우디의 친구들'(Amics de Gaudí) 주최로 가우디에게 헌정하는 첫 전시가 열렸으며, 큐레이션으로는 J.M. 소스트레스, 오리올 보이가스와 호안 프라트스가 참여했습니다. 다양한 물품과 모형, 카탈라-로카가 촬영한 대형 건물 사진이 등장하는 이 전시는 매우 현대적인 전시였습니다. 전시품 중에는 라페드레라 1층의 격자 세 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격자들은 이후 '가우디의 친구들'(Amics de Gaudí)에 헌정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구엘공원의 가우디 하우스 박물관 정원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미국 출신의 건축사학자이자 '가우디의 친구들'(Amics de Gaudí) 창립자인 조지 R. 콜린스가 건물 여러 곳을 촬영한 사진에서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그는 호텔 펜션 사세아에 머물렀습니다. 콜린스는 뉴욕 MoMA에서 ‘가우디’ 전시를 추진하였습니다. 라페드레라 1층의 격자가 미국인 수집가에게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수 년이 흐른 이후, 이 격자는 MoMa 컬렉션의 일부로 소장되었습니다.
 
와세다 대학의 건축가 이마이 켄지는 일본에서 '가우디의 친구들' 협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이마이는 일본에서 가우디의 유산을 알렸으며 여러 차례 라페드레라를 방문했습니다.
1947

1966
새로운 용도와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
건축가 힐 네보트는 메인 플로어의 집을 노던 보험 회사의 사무실로 개조하였습니다.
 
1979년에는 출판업자 올레가리오 소텔로 블랑코가 메인 플로어를 임대하기도 했습니다. 카레르 데 프로벵카 쪽에는 아트 갤러리가 있었으며, 파세이그 데 그라시아 쪽에는 센트로 아라고네스 데 사리아가 운영하는 빙고 홀이 있었습니다.
 
1969년 8월 20일, 이 건물은 스페인 정부에 의해 가우디의 다른 작품과 더불어 국가적 중요성을 가진 역사 및 예술 기념물로 제정되었습니다. 카탈루냐 문화유산법이 시행됨에 따라 라페드레라는 국가문화유산(BCIN) 목록에 자동으로 등재되었으며, 최고 수준의 유산에 대한 인정이자 보존 조치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1984년 11월 2일, 라페드레라 - 카사밀라는 뛰어난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아 구엘 공원 및 구엘 저택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76년 12월 1일, 지하 차고 일부가 쇼핑센터 메르카디요 및 라페드레라 마켓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하여 50여 곳의 부티크가 입점하였습니다. 가죽 제품, 향수와 음반, 기념품부터 서점, 원예점 등 다양한 업종이 있었습니다. 1층에는 사진관과 패션하우스 파레라, 가죽 제품 전문점 마르팔, 스낵바와 담배 가게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인두스트리에스 하르디, 하밉 탐정, 라모스 & 아로요 아보가도스 등의 새로운 세입자가 입주하기도 했습니다. 라페드레라의 공증인 카르멘 부르고스-보스크와 그의 아들 유이스 로카 사스트레 뭉쿠니도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1971년, 대형 석재가 1층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보존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따라서 건축가 안토니오 코마스 데 멘도사의 지휘 하에 적절한 수리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1966

1986
다시 발견된 보물
오랜 방치 끝에 1986년 12월, 카익사 카탈루니아가 건물을 매입하고 복원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1992년 7월, 메인 플로어가 전시홀로 개장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오래된 차고가 강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건물의 다락에는 가우디의 삶과 작품에 대한 최초의 상설 전시가 마련되었으며, 가우디 건물 안에서는 최초의 상설 전시입니다.
 
1996년 6월, 건물 전반에 대한 복원 작업이 완료되었으며 문화 센터로 공공에 개방되었습니다.
1986

2013
뉴스
카탈루냐 라페드레라 재단은 독립 민간 재단으로 자체 활동으로 창출한 모든 자원을 사회, 환경, 교육 및 문화 프로젝트의 운영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매년 인재를 육성하고 창작과 교육을 장려하고 자연 및 문화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개발해 나가고 있습니다.
 
본 재단은 현재 라페드레라 건물의 소유주로 다목적 용도의 독창적 공간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건물은 재단의 본사이자 일일 및 야간 관람으로 공공에 개방되며, 전시와 컨퍼런스와 각종 활동이 개최되는 문화 센터이기도 합니다. 임대 공간 및 1층의 회사 사무실과 각종 상점도 마련되어 있어 주거지이자 임대 주택 건물로서의 본래 용도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재단은 라페드레라를 다용도로 제공하면서도 수많은 방문객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최상의 관람 환경을 유지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세계유산 보존을 꾀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2,9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라페드레라를 찾아주셨으며, 메인 플로어의 홀에서는 90회 이상의 전시가 개최되는 등 카탈루냐 라페드레라 재단은 바르셀로나시를 대표하는 명망 있는 문화적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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